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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역 지금 봐도 소름 끼치는 좀비

by 월척여행 2025. 4. 21.

만화영화 서울력 좀비

서울역, 지금 봐도 소름 끼치는 현실 풍자 (좀비+사회고발)

[디스크립션: 주제 소개]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서울역》(2016)은 단순한 좀비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좀비라는 장르의 외피를 빌려, 현대 한국 사회가 외면한 계층과 문제를 극도로 냉철하게 드러내는 사회 고발 드라마다.
서울의 심장부이자 하루 수십만 명이 스쳐가는 공간인 '서울역'을 배경으로, 이 영화는 도시의 어두운 이면, 무관심,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좀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이고, 바이러스보다 더 확산이 빠른 것은 무관심이라는 메시지는 2025년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라서 더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영화 《서울역》이 어떻게 좀비 장르를 통해 현대사회의 민낯을 고발하는지를 깊이 있게 분석한다.

좀비보다 무서운 건 사람이다: 서울역의 인간군상

《서울역》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진짜 괴물은 좀비가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영화는 감염 확산이라는 패닉 장르의 전형적 공식을 따르면서도, 한 인물의 생존 여정을 통해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무관심과 계층적 불평등을 정면으로 들여다본다.

주인공 혜선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이미 가족과 사회로부터 배제된 인물이다. 보호자란 이름의 양아버지는 그녀를 통제하고 소유하려는 가해자이고, 연인이라 자처하는 남자는 그녀를 경제적 수단으로만 바라본다.
바이러스가 퍼진 와중에도 혜선의 주변 인물들은 그녀의 생존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권리를 주장하는 데 더 열중한다. 감염된 좀비가 아니라, 감정 없이 도구화된 관계 속에서 사람이 사람을 소비하는 구조가 더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특히 영화 초반, 피를 흘리며 쓰러진 노숙자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장면은, 한국 사회의 이면을 날카롭게 찌른다. 그는 병원에서도, 경찰서에서도 돌봄의 대상이 아닌 처리 대상일 뿐이다.
결국 바이러스는 그가 죽은 뒤에도 소리 없이 번져간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며, 모두가 ‘누군가가 알아서 하겠지’라는 태도로 일관한다. 이 무책임과 무관심은 우리 사회가 이미 경험해 온 재난들과 너무도 닮았다.

이런 면에서 《서울역》은 ‘좀비’라는 소재를 사용했지만, 사실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선의 부재를 일관되게 비판하는 영화다. 감염의 공포보다도, 사회 시스템의 방관과 시민 개개인의 무심함이 훨씬 더 차가운 진실로 다가온다.
좀비가 아니라, 사람이 무서운 영화. 이것이 《서울역》이 관객에게 던지는 첫 번째 경고다.

서울역이라는 공간, 그 자체가 상징

서울역이라는 장소는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공간이자 캐릭터다. 하루 수십만 명이 지나다니는 교통의 중심이자, 동시에 사회적 경계인들이 밀집한 공간. 영화는 그 상반된 이중성을 정면으로 직시한다.
우리는 흔히 서울역을 '지나다니는 곳'으로만 생각하지만, 이 영화는 거기 머무는 이들의 존재를 전면에 드러낸다.

현실의 서울역 광장은 수많은 노숙인과 노년 빈곤층, 저소득 이주민들이 삶을 연명하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일상 속에서 철저히 무시하며 지나간다. 영화는 이러한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중심인물로 삼아, 시선을 강제로 돌려놓는다.

특히 혜선이 터널 같은 지하도로를 계속해서 달리는 장면은 마치 끝없이 반복되는 절망과 탈출구 없는 구조를 상징하는 듯하다. 출구는 어디에도 없다. 닫힌 철문, 끝나지 않는 계단, 지나치기만 하는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도시가 어떻게 개인을 소외시키고 갇히게 만드는지를 시각화한다.

더불어 ‘서울역’은 상징적으로도 한국 사회의 민낯이 드러나는 장소다. 외국인 관광객, 출장자, 귀가하는 시민들이 한 공간에 몰리지만, 서로는 전혀 관계가 없다.
혜선이 위급 상황에서도 도와달라고 외치지만, 대부분은 귀찮은 듯 외면한다. 이 장면은 그 어떤 좀비 액션보다 더 강한 씁쓸함을 남긴다.
도시의 중심은 생존의 중심이 아니다. 오히려 더 위험하고, 더 고립된 공간이다. 서울역은 물리적 장소를 넘어, 이 영화에서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은유로 작동한다.

연상호 감독의 시선: 좀비는 장치, 고발이 핵심

연상호 감독은 《서울역》에서 장르적 재미를 극대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장르를 빌려 현실을 고발하는 데 집중한다. 이는 그가 앞서 만든 《돼지의 왕》, 《사이비》 등에서도 드러났던 특유의 연출 철학이다.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적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역》은 시청각적으로 강력한 현실감을 전달한다. 이는 감독이 이야기의 본질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좀비라는 소재는 이미 익숙하지만, 연상호는 이를 ‘한국적 맥락’에서 재해석한다. 감염은 빠르고 무서우나, 그보다 더 무서운 건 가족이 가장 폭력적이며, 공권력은 무능하고, 시민은 무심하다는 사실이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바이러스보다 더 빠르게 ‘인간다움’을 소멸시킨다.

특히 결말부에서 밝혀지는 반전은 충격적이다. 혜선을 찾는다고 주장했던 남성이 사실은 그녀를 감시하고 지배하려 했던 존재라는 사실은, 영화 전반의 긴장감에 가족과 보호자라는 가면을 쓴 또 다른 억압자의 존재를 덧씌운다.
‘가족’이라는 말조차 얼마나 폭력적인 수단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영화는 개인 대 개인의 관계 속 권력 구조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이후 개봉한 《부산행》이 블록버스터 스타일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것에 비해, 《서울역》은 비교적 조용히 개봉했지만, 장르적 완성도나 사회적 메시지 측면에서 보면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진짜로 바이러스보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연상호 감독은 그 답을 관객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결론: 요약 및 Call to Action]
《서울역》은 겉으로는 좀비 애니메이션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의 가장 민감한 현실을 건드리는 작품이다.
노숙자, 성매매 여성, 가출 청소년, 무책임한 가족, 그리고 방관하는 대중. 이 모든 요소가 하나의 도시 공간 안에서 충돌하며,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공포를 만들어낸다.

소름이 끼치는 건 좀비가 아니다.
혜선을 무시한 병원, 혜선을 통제하려는 아버지, 혜선을 이용하려는 남자, 그리고 혜선을 외면한 우리들.
우리는 지금, 서울역에 살고 있는 좀비가 아닌가?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 사라지고 있다.
다시 이 영화를 꺼내야 하는 이유는, 그 질문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