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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폭력, 2025년 다시 보는 영화 소리도 없이

by 월척여행 2025. 4. 29.

소리도없이 영화 장갑 끼는 씬

《소리도 없이》는 2020년 극장가에 조용히 등장했지만, 강한 여운을 남긴 작품이었다.
납치를 업으로 삼는 두 남자가 예기치 않게 아이를 떠맡으며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폭력과 윤리, 인간성의 모호한 경계를 침묵 속에서 드러낸 한국 범죄 드라마다.
2025년 지금, 다시 꺼내보니 더 묵직하고 날카롭게 다가온다.

말이 없는 범죄자, 그러나 지극히 인간적인

《소리도 없이》는 ‘말하지 않는’ 주인공으로 시작한다.
유아인이 연기한 태인은 한 마디의 대사 없이, 영화 내내 자신의 역할을 침묵 속에서 수행한다.
하지만 그의 눈빛, 걸음걸이, 옷차림, 주변과의 거리감은 이미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태인은 범죄조직의 하수인이다. 그는 살인범이 아니고, 납치를 기획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시체를 치우는 사람’이다. 누군가가 죽고 나면 그걸 처리하는 역할,
극 중 대사 한마디 없이 이 잔인한 업무를 ‘직업처럼’ 묵묵히 해낸다.
어쩌면 이것이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태인의 윤리적 중립성이다.
그는 범죄를 저지르지도, 멈추게 하지도 않는다. 단지 행한다.

하지만 영화는 태인을 한순간도 가해자나 피해자로 단정하지 않는다.
그는 회색지대 속에 존재하는 인물이다.
채식주의자이자, 동물에게 자상하고, 아이를 해치지 않으며, 감정을 함부로 표출하지 않는다.
그의 세계에는 도덕이 없지만, 대신 감정이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아이와의 동거 속에서 서서히 드러난다.

특히 인상 깊은 장면은 아이가 밥을 먹는 걸 보고 함께 먹으려다 멈칫하는 순간이다.
그 짧은 찰나에 담긴 태인의 고민은,
‘이 아이와 내가 지금 어떤 관계인가’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며,
그것은 인간성과 죄책감의 기묘한 교차점에 서 있는 순간이다.

그의 침묵은 많은 것을 말한다.
무언 연기로도 사람의 본질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감정은 언어보다 깊이 전달된다는 것을,
유아인의 연기는 이 모든 복잡한 내면을 대사 없이도 구현해낸다.

폭력은 언제 일상이 되는가 – 무감각의 무서움

이 영화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은 폭력 장면이 아니다.
사실 이 영화는 잔혹한 장면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강력한 공포와 불편함을 남기는 이유는,
바로 폭력이 ‘일상화된 풍경’처럼 그려지기 때문이다.

태인과 창복은 어린 아이를 납치해오는 일을 대단한 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것은 ‘일’일 뿐이다.
낯선 사람을 납치해 트렁크에 실어도, 그 일에 도덕적 판단이 따르지 않는다.
심지어 밥을 먹고, 간식을 사고, TV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우리가 나쁜 일을 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 영화는 한국 범죄 영화의 전형적인 틀을 깨버린다.
폭력이 ‘단계적으로 성장’하거나 ‘감정적으로 폭발’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익숙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이 무감각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폭력이라는 사실을 관객은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잔인함을 배제한다.
하지만 그 대신 아이가 잠든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TV 소리,
조용히 볶아지는 반찬 냄새, 흐릿한 형광등 불빛 속에서
‘정상처럼 보이는 범죄’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폭력은 이렇게 일상이 된다.
죄책감 없는 일상, 도덕성 없는 감정,
그리고 그 안에서 잠들고 마는 윤리.

《소리도 없이》는 말한다.
폭력은 드러나야 무섭다기보다, 보이지 않을 때 더 무섭다.
그것이 사회 속에서, 그리고 개인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 영화는 침묵과 함께 보여준다.

침묵으로 말하는 영화 – 시선, 프레임, 여운의 미학

《소리도 없이》의 가장 독보적인 점은 바로 그 '침묵의 미학'이다.
이 영화는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 대신 화면 안의 오브제, 시선, 색채, 음악 없이 구성된 배경음 등
모든 시청각 요소를 통해 감정과 메시지를 조용히 전달한다.

특히 카메라 워킹은 탁월하다.
관찰자의 위치에서, 때로는 아이의 눈높이에서,
때로는 태인의 뒷모습을 묵묵히 따라가며 관객을 몰입시킨다.
감독은 인물에게 거리감을 유지하면서도,
그들의 내면에 깊숙이 접근하는 묘한 시선 구조를 만든다.

또한 배경의 색채 사용도 주목할 만하다.
거의 모든 장면이 무채색에 가깝거나 톤 다운된 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색채는 인물들의 감정 상태와 사건의 무감정성을 은유한다.
심지어 음식조차 색감이 없고, 방 안의 조명도 따뜻하지 않다.
이것은 감정의 온도가 낮은 세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방식이다.

무엇보다 인상 깊은 건 음악의 부재다.
이 영화는 OST가 거의 없다.
공기 소리, 자동차 엔진, 발자국, 숨소리—
그것들이 리듬과 정서를 만든다.
이러한 접근은 자칫 지루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 침묵 속에서
관객은 더 많은 ‘의미’를 듣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무표정한 얼굴, 가로등 불빛 아래 멈춰 선 인물,
무거운 공기, 아무 말 없이 사라지는 걸음.
그 순간 관객은 영화 내내 쌓아온 질문들을 한꺼번에 떠올리게 된다.

이 영화는 결코 친절하지 않다.
하지만 바로 그 불친절함이, 관객 스스로 해석하고 질문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침묵의 힘이야말로 이 영화의 정체성이다.

[결론: 요약 및 Call to Action]
《소리도 없이》는 침묵을 통해 가장 큰 소리를 들려주는 영화다.
범죄와 윤리, 인간성의 회색지대를 잔잔하게, 그러나 뼈 깊숙이 파고든다.
2025년인 지금, 다시 마주한 이 영화는
말없이도 충분히 강력하다.
놓쳤다면 지금, 그 조용한 울림 속으로 다시 들어가보자.